수백 개의 뮤직비디오가 다를 수 있는 이유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뮤직비디오 프로덕션' 이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국내의 손꼽히는 프로덕션이자 빈지노, 자이언티, 크러쉬, 딘 같은 개성 강한 싱어송라이터 뿐만 아니라 I.O.I, 위너 같은 아이돌까지 장르 불문, 다수의 뮤지션들과 수 많은 작업을 해 온 디지페디(DIGIPEDI). 그러나 디지페디가 진짜 대단한 이유는 수 십편의 새롭고 다양한 뮤직비디오 속에서도 그들만의 컬러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촬영과 마감 스케줄에 쫓기면서도 꾸준히 신선한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올해로 10년 차, 두 명으로 시작해 이제는 프로덕션을 이끌어가고 있는 성원모 감독에게 꾸준한 크리에이티브의 비결에 대해 물었다.   

 

[LIFTOFF] EP.03 - "수 백 개의 뮤직비디오가 다를 수 있는 이유" by 디지페디 성원모 감독  

 
 
 
 

 

수 백 개의 뮤직비디오가 다를 수 '없는' 이유  

일단 강의 제목이 바뀌어야 할 거 같아요.  '수 백 개의 뮤직비디오가 다를 수 없는 이유'.  사실 창작하는 사람의 욕심은 100가지의 재료가 있고, 100가지의 기술로 만들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죠. 실력을 보여주고 싶은. 그러나 소재(재료)만 바꾸는 것보다는 연출하는 형태를 바꾸는 게 진짜 연출, 크리에이티브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리(연출)하는 기술을 계속 바꾸고 연마하면서 적재적소에 쓰고싶단 마음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다른 걸 하고싶어도 내 입맛에 맛 없는 걸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조금 다른 '디지페디' 스타일의 힙합 뮤직비디오 

제가 잘 아는 감독이 이런 힙합 뮤직비디오를 찍는 걸 보면서 약간 부러웠어요. '그럼 저 모델들 전화번호를 다 알까?' '나도 이런 걸 촬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재밌는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하기도 했죠.

어거스트 프록스(August Frogs)가 촬영한 스웨그(Swag) 넘치는 뮤직비디오 

왜 나는 이런 식의 힙합 뮤직비디오가 하나도 없을까? 어떤 힙합 뮤직비디오에서는 벤틀리를 타는데. 제가 만든 힙합 뮤직비디오에서는 주인공들이 학을 타고 있거나,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고, 커다란 벽에 머리를 박고 있고.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는 빈지노 'How Do I Look'(2014))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는 빈지노 'How Do I Look'(2014)) 

학을 타고 있는 기리보이 '호구' (2016)

학을 타고 있는 기리보이 '호구' (2016)

뮤직비디오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취향' 

결국 제가 '멋있는 걸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거예요. 수 백 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지만 멋있는 정서의 뮤직비디오가 거의 없거든요. 제가 멋있는 정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같고. 실제로 제가 무언가를 보고 '멋있다'라고 느끼는 경우도 적은 거 같아요. 그 쪽 감각이 둔해요. 그러다보니 '멋있는'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뮤직비디오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요리사의 간이나 입맛 같은 거 같아요. 내가 어떤 맛을 좋아하냐에 따라 영상, 만들어지는 컨텐츠의 톤이 결정되는 거 같아요.  

알고보니 그들은 '나'의 모습이었다?

난 아무리 다르게 만들려고 노력을 해도 취향이라는 게 강력하게 반영이 되는구나. 결국 이 뮤직비디오 주인공들이 다 내 모습이구나. 이 사실을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저는 다 다른 걸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톤이나 뉘앙스는 달라지지 않는다.

 

벗어날 수 없는 '그 분' 

지코의 '너는 나, 나는 너' 뮤직비디오는 결혼 전에 만들었어요. 여자가 밤에 혼자 일하는 중에 편의점에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온다는 공상을 하는 내용고, 묘한 설렘이나 그런 게 담겨있죠. 몇 개월 후에 만든 딘과 헤이즈의 'And July'라는 뮤직비디오는 동거하는 연인이 서로 싸우는 내용이에요. 결혼한 이후에 만든 뮤직비디오인데요. 

 
 

결혼 전에 만든 지코의 '너는 나, 나는 너'(2016) 

결혼 이후 만든 딘&헤이즈 'And July' (2016) 

만들고 나서 몇 달 후에 알게 됐어요. 내가 결혼을 하니까 동거를, 사랑에 대해서 딘과 헤이즈 같은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구나. 놀랍겠지만 저 뮤직비디에서의 딘이 저인 거죠. 저게 저와 제 와이프의 모습이구나 생각하게 되니까, 나라는 사람이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내가 만들어내는 컨텐츠에는 강력하게 반영이 되는구나 느끼게 되더라고요. 

10년 동안 디지페디가 해왔던 이야기     

결국 결론을 내린 게 수 백 가지 뮤직비디오를 다 다르게 만들 수 있다면 표절하는 감독이거나 '해리성 정체 장애'다. 수 백 가지를 다 다르게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한 거 같아요. 전 10년 동안 해왔던 게 결국 내 이야기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깨닫고 있는 중 이거든요. 

 

젊은 창작자들에게 디지페디가 바치는 뮤직비디오 'Break'

젊은 창작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빈지노의 'Break'는 젊은 창작자들-뭔가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컨셉으로 만든 거거든요. 빈지노와 빈지노 친구인 IAB Studio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조금이라도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 입장에서 용기를 주고싶고. 제가 빈지노에게 용기를 줄 필요는 없겠지만(웃음) 끝까지 제 성격상 멋지게 벽이 부서지는 장면은 안나옵니다. 결국 실패를 하는데 창작을 하는 게 이런 일의 반복이 아닐까 싶어요. 

 

  

 

 <리프트오프> 하이라이트 영상과 글은 다음 이야기, 제주맥주 권진주 실장 편에서 이어집니다.